2021.11.20
주간한국 65.9.26
* 톱10
(괄호 안의 숫자는 지난주의 순위)
1.▲<쥐구멍도 볕들날 있다>(1) 김상국
2.↑<진주 조개잡이>(3) 빌리본 악단
3.↓<이대로 죽고 싶어>(2) 남일해
4.↑<부베의 연인>(5) 영화주제곡
5.↓<여자가 더 좋아>(4) 최희준
6.↑<사랑은 괴로워>(7) 한명숙
7.▲<사랑이 끝났을 때>(0) 한명숙
8.= <성난 독수리>(8) 남일해, 강수향, 이미자, 이혜경
9.▲<태양이 싫은 다방족>(0) 최희준
10↓<모래 위의 발자국>(9) 최양숙--주간한국 65.9.26, 21쪽
주간한국 65.9.19
* 톱10
(괄호 안의 숫자는 지난주의 순위)
1.▲<쥐구멍도 볕들날 있다>(1) 김상국
2.= <이대로 죽고 싶어>(2) 남일해
3.↑<진주 조개잡이>(4) 빌리본 악단
4.↓<여자가 더 좋아>(3)(최희준)
5.= <부베의 연인>(5) 영화주제곡
6.= <잃어버린 태양>(6) 최희준
7.↑<사랑은 괴로워>(8) 한명숙
8.↑<성난 독수리>(9) 남일해, 강수향, 이미자, 이권혜경
9.↑<모래 위의 발자국>(10) 최양숙
10↓<쾌지나 칭칭나네>(7) 김상국--주간한국 65.9.19, 21쪽
주간한국 65.9.12
* 톱10
(괄호 안의 숫자는 지난주의 순위)
1.▲<쥐구멍도 볕들날 있다>(1) 김상국
2.↑<이대로 죽고 싶어>(3) 남일해
3.↓<여자가 더 좋아>(2) 최희준
4.= <진주 조개잡이>(4) 빌리본 악단
5.↑<부베의 연인>(6) 영화주제곡
6.↑<잃어버린 태양>(7) 최희준
7.↓<쾌지나 칭칭나네>(5) 김상국
8.= <사랑은 괴로워>(8) 한명숙
9.= <성난 독수리>(9) 남일해, 강수향, 이미자, 이권혜경
10▲<모래 위의 발자국>(0) 최양숙--주간한국 65.9.12,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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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 9월 12일 순위표에서 한 주가 지난 9월 19일에는 등외로 빠진 노래 한 곡 없이 순위 변동만 있었는데 9월 26일에는 7위 곡 '사랑이 끝났을 때'(한명숙)와, 9위 곡 '태양이 싫은 다방족'(최희준).. 두 곡이 순위에 들었습니다.
그 대신 순위에 진입한 두 곡과 자리 바꿈, 등외로 밀려난 노래는 '잃어버린 태양'(최희준)과 코믹가요 '쾌지나 칭칭나네'(김상국)인데 최희준이 노래만 바뀐 채 두 곡을 채워 자리를 지킨 반면, 김상국은 '쥐구멍도 볕들 날 있다'가 꾸준하게 1위를 지켜오고 있지만 '쾌지나 칭칭나네'가 등외로 빠져 나가는 바람로 두 곡을 동시에 올렸던 가수 기록은 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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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다방과 관련이 있는 노래는 정말 많습니다만, 이렇게 노골적인 가사로 다방이 '꿈을 잃어 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안식처(安息處)'라고 공공연하게 말했던 노래는 이 노래 전에는 별로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듯 꿈 잃은 사람들이 뻔질나게 들락거릴 것 같은 이 다방이라는 곳도, 그렇지만 아래에 제가 인용한 "다방에 관한 나무 위키"의 글을 보면, 노래 가사에서 표현한 그 햇볕 들지 않은 어두컴컴한 '가난한 서민들의 解放區가 아니라, 오히려 유럽 방식의 고급 문화 살롱 같다는 생각이 휠씬 더 짙게' 느껴집니다.
太陽이 싫은 茶房族 - 최희준
임희재 작사. 박춘석 작곡
오늘도 모였다네 태양이 싫어서
이곳에 모였다네 꿈이 없어서
꿈을 나눌 꿈도 없지 커피 한 잔 시켜놓고
그러나 태양이 싫어서 이곳에 모였다네
내일도 만납시다 인사는 없어도
우리는 만난다네 찻값 없어서
차를 나눌 우정 없지 엽차 한 잔 시켜놓고
그러나 태양이 싫어서 이곳에 모였다네
오늘도 모였다네 태양이 싫어서
이곳에 모였다네 꿈이 없어서
꿈을 나눌 꿈도 없지 커피 한 잔 시켜놓고
그러나 태양이 싫어서 이곳에 모였다네
(1965 오아시스 OL 12477) 오아시스 베스트 3인집 스플릿 앨범
최희준, 조애희, 최양숙/ 박춘석 작편곡
1. 태양이 싫은 다방족(최희준)
2. 메랑코리 부루스(최희준)
3. 죽은 자와 산 자(최희준)
4. 무정의 사십계단(최희준)
5. 사르빈강에 놀진다(최희준)
6. 대충신(최희준)
7. 얼룩진 면사포(최양숙)
8. 저 하늘과 이 땅(최양숙)
9. 밤나비(최양숙)
10. 첫사랑(조애희)
11. 강 따라 별 따라(조애희)
12. 잃어버린 백조(조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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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房; 나무 위키] 한반도 최초의 근대식 다방은 구한말인 1902년 정동에 있던 손탁호텔(Sontag Hotel)에 부설된 것이지만, 본격적인 다방 문화의 시초는 일제강점기때 일본인들이 경성 이곳 저곳에 '끽다점'(喫茶店)을 차리면서부터다. 남대문역에 있던 끽다점과 1923년 종로에 생겨났던 '후타미'(二見) 등이 있었다. 물론 조선인이 차린 다방도 아주 없진 않았는데, 복혜숙이 운영했던 '비너스'와 시인 이상이 생계를 위해, 예술가들이 모일만한 장소를 만들기 위해 차렸던 '제비다방'이 가장 유명했다. 현재는 일제강점기에 개설된 다방은 모두 사라졌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다방은 전란 와중인 1952년 개업한 전주의 삼양다방이다.
80년대까지 다방은 오늘날의 카페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많은 젊은 지식인과 예술가를 꿈꾸는 청년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던 곳으로, 그 문화는 전후 프랑스의 지성인들이 형성했던 카페의 知的 문화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 당시의 다방은 유럽의 살롱 역할에 가까웠다고 봐도 좋을 듯.
해방 이후 50년대 명동 일대의 다방에는 문인들이 죽치고 있었다. 문예회관에는 김동리와 서정주를 중심으로 한 기성 문단의 '선생님'급 문인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다방에는 젊은 문인들이 꿰차고 앉은 식이었다. 청동다방에는 오상순이, 포엠에는 박인환과 이봉구가 드나드는 식이었다. 특히 오상순은 '무소유'를 실천한 문인으로 유명한 만큼 그야말로 '집도 절도 없었다.' 그래서 항상 그가 앉아있는 청동다방이 그의 주소지 노릇을 해서, 심지어 오상순에게 문안이나 세배를 오는 문인들도 청동다방으로 가야 했다. 한국전쟁으로 다들 부산으로 피난갔던 시절에도 문인들이 다방에 모이는 건 똑같아서, 김동리는 부산에 피난온 문인들이 모이던 다방을 소재로 <밀다원시대>라는 단편소설도 썼다.
상황이 이런 탓에 다방 마담들도 문인들을 많이 배려해주었는데, EBS 문화사 시리즈 <명동백작>에는 다방 '모나리자'의 마담이 외상값에 못이겨 문을 닫으며 문인들이 맡겨두었던 시계, 신분증 등을 돌려주는 장면도 등장한다. 조병화는 자신이 드나들던 다방의 마담에게 헌정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명동이 소비문화의 중심지가 아닌 '창조'의 중심지 노릇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
60년대로 넘어가면서 문화 중심지가 대학로로 옮겨가고, 대학로 주변에 '돌체' 등의 음악감상실이 생겼는데,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는 다방이었다. 대학로 일대에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생과 법대생들이 애용했던 "학림다방"이라는 곳이 특히 유명했는데, 70년대 중반 학번들까지 거의 모든 학생들이 이 다방을 한 번 이상 이용했으며 추억으로 생각할 정도. 현대 한국문학이 싹튼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은 지금도 혜화역 3번 출구 앞에서 성업중. 아르코 예술극장 로비에 분점도 있다. 한편 연대생들이 70~80년대에 애용했던 신촌 독수리다방도 유명했고, 90년대에는 커피전문점으로 이미지 변신을 하면서 명맥을 유지해 나갔지만 프랜차이즈의 범람으로 인하여 2005년 결국 폐업했다...가 2013년에 애칭이던 독다방 이름으로 다시 부활했다. 원래 주인 할머니의 손자가 다시 영업을 하는 듯하다. 현재는 다시 독수리다방으로 이름을 환원하였다.
예로부터 한국영화계의 중심지인 충무로도 다방의 성지였다. 영화 배우들이나 감독들이 새로운 영화 구상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할 때 다방만큼 좋은 곳도 없었기 때문. 원래 배우였다가 연출가로 전업한 남기남은 스타다방에 갔다가 그곳에서 미남 배우인 최무룡을 보고는 '나같은 얼굴로는 배우하면 안 되겠구나.'라며 절망했다고.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몇 군데는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카페 문화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전이었고 패스트푸드 체인점이나 멀티플렉스 극장 같은 문화시설은 물론, 무엇보다도 휴대폰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휴대폰이 대중화된 2000년대 초반 이전까지는 약속장소와 시간을 확실히 정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고, 덕분에 다방뿐만 아니라 해당 지역의 랜드마크는 종종 약속장소로 활용되었다. 따라서 위와 같은 특별한 케이스는 물론 보통의 2~30대들도 친구를 만나려면 다방으로 약속장소를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때문인지 아예 상호 자체가 '약속다방'인 곳도 꽤 많다. 지금도 다방에 혼자 들어가면 사람 만날 약속 있냐고 반드시 확인해보는 관례가 남아 있다.
당시의 다방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예로, 한국 최초의 복싱 세계챔피언 김기수씨가 은퇴 후 명동에 차린 "챔피언다방"을 들 수 있다. 당시 챔피언다방은 명동의 노른자위 땅에 있었는데(지금의 전진상 교육관 옆), 젊은이들의 약속장소로 꽤나 붐볐다. 그리고 당시 인스턴트 커피가 아닌 사이폰 커피를 팔았다.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히 고급 커피를 팔았던 셈.
하지만 이 때에도 퇴폐적인 다방이 아주 없던 건 아니다.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특수끽다'(特殊喫茶)란 이름으로 변칙 영업을 하는 다방이 존재했으니 알고 보면 이상할 것도 없다. 70~80년대에도 그냥 평범한 다방인줄 알고 들어갔다가 레지들이 착석을 하고 치근덕 대는 통에 황급히 빠져나왔다는 경험담을 가끔 들을 수 있었다.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정화되면서 그나마 이러한 문화가 외곽으로 밀려나서 다행인거지, 다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준 접대부 취급을 받았고, 사실상 천한 직업의 오명을 벗지 못했다. 이러한 흐름이 아래에서 보이는 "티켓다방" 방식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다방하면 커피보다는 쌍화차가 떠오르는 사람도 많을 것인데 그 배경에는 5.16 군사정변 이후에 커피 판매 금지 같은 이상한 상황도 있었기 때문이다. 외래품 판매 금지와 엮이면서 커피의 판매가 중단되더니, 이후에는 코코아, 홍차 등을 파는 것도 금지되었고 커피를 못파니 콩가루를 태워서 만든 콩피 같은게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가 계란 노른자 띄운 쌍화차로 대표되는 구식 다방 이미지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 구식 이미지를 역으로 빈티지스럽게 이용해서 살아남은 다방들도 있다. 인사동이나 충무로 등지의 오래된 다방들은 일부러 초창기 인테리어나 소품들을 최대한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서 하얀 도자기로 된 재떨이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놋쇠주전자같은 골동품도 볼 수 있다. 가까운 곳은 배달도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