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12
어제의 <娘娘18歲>에 이어 오늘 또 다시 "娘娘에 아리랑타령"입니다.
아니, 이런 간들어지는 娘娘만한 노래가 있다면야 내일도 모레도,
끝없이 娘娘~만 부르면서 살아도 행복하겠습니다. 그래서...
"...어찌어찌도 좋았던지요, 쪼~끔 울었소~"
아리랑 娘娘 - 白蘭兒
處女林 작사, 金敎聲 작곡/
1941년 1월 太平레코드(Taihei,GC 3014-A)
1
봄이 오는 아리랑 고개
제비오는 아리랑 고개
가는 님은 밉상이요 오는 님은 곱상이라네
아리 아리랑 아리랑 고개는 님 오는 고개
넘어 넘어도 우리 님만은
안 넘어요
2
달이 뜨는 아리랑 고개
꽃도 뜯는 아리랑 고개
우는 님은 건달이요 웃는 님은 도련님이지
아리 아리랑 아리랑 고개는 도련님 고개
울어 울어도 우리 님만은
안 울어요
3
경사났소 아리랑 고개
立春大吉 아리랑 고개
족도리에 羅衫소매 시집가는 아리랑 고개
아리 아리랑 아리랑 고개는 족도리 고개
어찌 어찌도 좋았던지요
쪼끔 울었소
박영호(朴英鎬, 1911(?)~1952(?)
작사가·극작가.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원산에서 성장했다는 설도 있다.
본명 외에 처녀림(處女林)이라는 필명으로도 많은 작품을 발표했고, 작사가 조명암(趙鳴岩)과 함께 김다인(金茶人)이라는 필명을 공동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1926년 1월 「동아일보」에 게재된 동요 <달아>의 작자가 바로 박영호인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대 말부터 사회주의 색채가 강한 연극에 참여한 것으로 전하며, 1930년대 초에는 조선연극사, 연극시장, 황금좌 등 극단에서 대중적인 희곡을 많이 썼다. 극작을
하는 동시에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연극 이론과 비평을 활발하게 발표했으며, 1930년대 중반 이후 동양극장 전속작가로 활동하다가 1939년에는 극단 고협(高協)에 가입하기도 했다.
대중가요 가사는 1932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본명을 썼고 처녀림이라는 필명은 1937년부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주요 음반회사에서 두루 작품을 썼으며, 시에론(Chieron)레코드와 태평(太平)레코드에서는 문예부장을 맡기도 했다. 오케(Okeh)레코드에서는 직책을 맡지는 않았던 것 같으나, 주요 히트곡을 많이 발표했다.
1930년대의 대표적인 대중극 작가로 이름을 떨쳤으나, 일제 말기에는 전시체제에 협조적인 작품을 쓰고 어용 문화단체에 가입해 활동하기도 했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에 참여했으며, 이후 사회주의적 성향이 뚜렷이 드러나는 행적을 보이다 1946년에 월북했다. 월북 이후 북한 연극계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하며, 6·25전쟁 중에는 종군작가로 활동했다고도 한다. 박영호의 죽음에 대해서는 1953년에 전사했다는 설도 있으나, 1952년에 병사했다는 설이 보다 유력해 보인다. 박영호는 조명암과 함께 광복 이전 대중가요 작사가로서 쌍벽을 이루었으며, 오랜 동안 음반회사 문예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보면 그 위상이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도 있다.
박영호가 작사한 주요 작품은 <세기말의 노래>, <조선행진곡>(이상 1932년), <빛나는 조선>, <신상사타령>, <정염의 휘파람>(이상 1934년), <청사홍사>, <돈바람 분다>, <애상의 썰매>, <봄타령>, <정한의 밤차>, <들국화>, <황금광 조선>, <낙화삼천>, <해금강타령>, <서반아연가>(이상 1935년), <불 꺼진 항구>, <꽃서울>, <명랑한 젊은 날>, <알아 달라우요>, <밀월의 대동강>, <고향은 눈물이냐>, <사나이 스물다섯>, <청춘해협>, <단풍제>, <청춘쌍곡선>, <감격의 그날>, <돈도 싫소 사랑도 싫소>, <범벅서울>(1936년), <당신은 깍쟁이야요>, <짝사랑>, <흑장미>, <눈물의 사막길>, <연락선은 떠난다>, <천리춘색>, <항구의 선술집>, <물방아 사랑>, <야루강 천리>, <인생극장>, <고향은 부른다>, <아 글쎄 어쩌면>, <처녀일기>, <캠핑전선>, <연애함대>, <상여금만 타면>, <불망의 글자>, <아가씨 운명>, <요 핑계 조 핑계>, <눈물의 경부선>, <청춘극장>, <서커스걸>(이상 1937년), <전화일기>, <마지막 혈시>, <선술집 풍경>, <내 채찍에 내가 맞았소>, <봄사건>, <청춘빌딩>, <우리는 멋쟁이>, <뱃사공이 좋아>, <청춘계급>, <신혼 아카스키>, <선창에 울러 왔다>, <찻집 아가씨>, <세월을 등지고>, <시큰둥 야시>, <모던 기생점고>, <눈물의 국경>, <항구에서 항구로>, <덩덕궁타령>, <오빠는 풍각쟁이>, <열정의 블루스>, <항구의 처녀설>, <마누라 대문 열어>(이상 1938년), <희망의 블루스>, <항구의 블루스>, <국경특급>, <기타에 울음 실어>, <북국 오천킬로>, <유랑극단>, <백두산 바라보고>, <봄신문>, <막간아가씨>, <상선보이>, <복조리타령>, <은어알 처녀>, <메리켕 항구>, <필둥 말둥>, <마도로수 수기>(이상 1939년), <눈물의 백년화>, <반달 뜨는 밤>, <울어라 문풍지>, <흘겨본 과거몽>, <오카리나 극장>, <한 잔에 한 잔 사랑>, <꿈꾸는 항구선>, <하물선 사랑>, <그네줄 상처>, <번지 없는 주막>, <산팔자 물팔자>, <그림자 고향>, <오동동극단>, <갈매기 쌍쌍>(이상 1940년), <아리랑 낭낭>, <만포선 길손>, <포곡새 천지>, <망향초 사랑>, <허허바다>, <고향길 부모길>, <마도로스 박>, <청춘해안>, <석유등 길손>, <봉화대의 밤>, <간도선>, <직녀성>, <고향 만리 사랑 만리>, <쌍돛대 탄식>(이상 1941년), <민초합창>, <사랑>, <할미꽃 아리랑>, <화촉동방>, <생산항구>, <북청물장수>, <아들의 최후>(이상 1942년), <서주 소식>, <부녀계도>, <천리전장>, <아주까리 선창> 등이다.
김교성(金敎聲, 1901~1960)
대중가요 작곡가. 서울 출생. 20세를 전후하여 이왕직양악대(李王職洋樂隊) 출신 연주인들에게 클라리넷을 배웠다. 1925년 무렵부터 무성영화를 위한 효과음악 연주단원으로 활약하였고, 연극단의 막간 여흥의 노래반주단원으로도 활약하였다.
1936년 신민요풍의「능수버들」을 왕수복(王壽福)의 노래로 발표, 성공하였다. 1930년대 후반 이후 신인가수선발대회의 심사위원으로 활약하면서, 진방남(秦芳男)·백난아(白蘭兒)·박재홍(朴載弘) 등을 발굴하였다.
1957년 대중가요 작사가들과 작곡가들의 모임인 한국가요작가협회 초대회장에 피선되었다.대표작품으로는「능수버들」외에 진방남이 부른「넋두리 20년」·「사막의 애상(哀傷)」, 백난아가 부른「찔레꽃」·「직녀성」, 박재홍이 부른「자명고(自鳴鼓)사랑」·「울고 넘는 박달재」등과 공보처 제정 국민가요로「고향역」이 있다.//
서울에서 출생. 1927년에 홍란파와 함께 경성방송국창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32년부터 《빅타》레코드회사의 전속작곡가로 근무하면서 리애리수의 취입판인 《처녀행진곡》, 강석연의 취입판인 《손님맞이》, 강홍식의 취입판인 《삼수갑산》, 김복희의 취입판인 《가는 봄》 등을 작곡하였으며 《포리톨》레코드회사로 전속을 옮긴 다음에는 선우일선의 취입판들인 《능수버들》, 《피리소리》 등을 작곡하였다.
그후 《태평》레코드회사로 전속을 옮긴 다음에는 백란아의 취입판들인 《찔레꽃》, 《직녀성》, 《아리랑랑랑》, 《할미꽃아리랑》, 미쓰꼬레아의 취입판들인 《북청물장사》, 《포곡새천지》, 백년설의 취입판들인 《눈물의 수박등》, 《남포불력사》 등 수많은 작품들을 남겨놓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