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23
백난아 여사님의 대표곡 중 <낭랑 18세>
<아리랑 랑랑>에 이어서
3번 째 포스팅 하는 노래는 저 유명한 <찔레꽃 >입니다.
저는 이 노래를 벌써 올린 줄 알고 있다가 주목 님이 쓰신 댓글을 읽고서
설마~ 하고 보았더니 글쎄, 이 노래가 빠져 있었더군요...
68년 성음에서 발매한 가요반세기 음반에는 대사가 들어있는 버전이 있는데
노래는 뒤에 부른 것이지만, 두 聲優(신원균, 남해연?) 분의 곡 해설이
너무나 애절해 듣는 내내 가슴을 저리게 합니다.
그래서 그 대사에 붙여서 1942년에 백난아 여사님이 맨처음에 불렀던
<찔레꽃>을 동시에 들어보려고 따로 노래파일을 하나 더 만들어 보았습니다.
즐겁게 감상하셨으면 합니다.
음원; 1968 성음 '가요반세기'의 대사에 덧붙인 原曲, 1942 Taihei(太平) KC 5028-A
찔레꽃 - 백난아
작사 김영일 / 작곡 김교성
1
찔레꽃 붉게 피는 南쪽 나라 내 故鄕
언덕 우에 草家三間 그립습니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리별가(離別歌)를 불러주던 못니즐 동무야
2
달 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세 동무
千里客窓 北斗星이 서럽습니다
三年 前에 모여 앉아 백인 寫眞
하염업시 바라보니 즐거운 時節아
3
軟粉紅 봄바람이 돌아드는 北間島
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꾀꼬리는 中天에 떠 슬피 울고
호랑나비 춤을 춘다 그리운 故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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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펌글 -
백난아(白蘭兒, 1923년 5월 16일 ~ 1992년)는 제주도 출신의 가수이다.
본명은 오금숙(吳金淑)이다.
1923년 5월 16일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1927년생이라는 설도 있지만 데뷔 연도와 여러 가지 상황을 미루어 짐작해볼 때 신빙성은 떨어진다.
서울양재고등여숙을 졸업하고, 1940년 태평레코드와 조선일보가 공동으로 주최한 콩쿠르 대회에서 2등으로 입상하였다.
같은 해, 선배가수 백년설에게 ‘ 백난아’라는 예명을 받고, 오동동 극단을 취입하였다.
〈오동동 극단〉이 히트되자 그녀는 계속 〈갈매기 쌍쌍〉, 〈망향초 사랑〉, 〈땅버들 물버들〉,
〈도라지 낭랑〉, 〈아리랑 낭랑〉, 〈찔레꽃〉, 〈흥아의 봄〉 등을 취입하였다.
대한민국이 일본에게서 해방될 직전까지 태평레코드에 전속으로 있으면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
해방 직후에는 ‘파라다이스 쇼단’을 운영하며 대한민국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고,
1949년부터는 럭키레코드 전속으로 〈금박댕기〉, 〈낭랑 18세〉, 고려레코드에서 〈인도야곡〉을 발표했다.
그러나 곧 한국 전쟁이 일어났고, 그녀는 전쟁 중 연예인들의 아지트였던 대구로 피난하였다.
그 곳에서 여러 연예인들과 활동하며 한때는 군예대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전쟁 후에는 태평레코드와 서라벌레코드에서 활동하며, 〈멕시코 나이트〉, 〈고랑포 아낙네〉 등을 취입하였다.
1960년대까지도 활발히 신곡 취입을 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주로 극장무대에서 활동하였다.
본격적인 TV시대가 열리면서, 그녀는 원로가수 대접을 받으며 방송출연을 활발히 하였는데
특히 〈가요무대〉에서 자주 출현하였다.
그러던 중, 1992년 대장암이 발병했고, 평소 지병이던 심장병이 겹쳐 결국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1941 년 5 월, 태평 레코드사에서는 이 '찔레꽃'을 내고
OK 레코드사 (==>고침 Okeh,오케레코드)에서는 고운봉의 '선창'을 발표했는데
별로 반응이 신통치 못했던 것이, 해방과 더불어 양사(兩社)의
이 두 노래가 약속이나 한 듯 각광(脚光)을 받아
히트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을 떠나 멀리 타향에서 핍박과 서러움에
눈물짓던 실향민들에게 찔레꽃 피는 고향을 노래한
백난아의 '찔레꽃'은 더 없는 향수를 자극하여 공감을 느끼게 하여
너도 나도 이 노래를 열창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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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은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2년에 백난아가 부른 한국의 트로트 곡이다.
첫 발표 시기는 1941년 5월이라는 설도 있다.
김영일이 작사하고, 김교성이 작곡한 곡으로,
한국의 야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 찔레꽃을 소재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렸다.
처음 백난아가 이 노래를 발표했을 때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온 것은 아니었으나,
이후 광복과 한국 전쟁 등을 거치면서 향수를 자극하는 가사가 시대적 상황과 맞아떨어지면서
꾸준한 인기를 얻어 '국민가요'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김교성과 백난아가 만주 공연을 다녀온 뒤,
만주 독립군들이 고향을 바라보는 심정을 담아 만들었다고 한다.
가사 중 3절에는 "북간도"라는 배경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북방의 이국에서 "남쪽나라 내 고향"과 "못 잊을 동무"를 그리워하는 애절한 사연이 소박하게 담겨 있는데다,
푸근하고 따뜻한 백난아의 창법과 잘 어우려져 한국적 정서와 망향의 아픔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
한국방송의 성인가요 전문 프로그램인《가요무대》가 2005년 방송 20돌을 맞아
가장 많이 불렸던 노래를 조사해 발표했을 때, 〈울고 넘는 박달재〉에 이어
전체 2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대한민국에서 오랫동안 애창되고 있다.
2007년 백난아의 고향인 제주도에 찔레꽃 노래 공원과 노래비가 세워졌다.
음원; オ-ケ-太平 LSK-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