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부산 지방을 다스리던 가장 고위직인 동래부사가 주재하던 곳인 동래부 동헌을 지나 동래시장이 있는 골목길을 거쳐 동래고등학교 쪽으로 걸어 나오면 학교가 있는 큰 길이 나오기 바로 직전 왼쪽에 공터가 나오는데 여기가 박차정 의사 생가로 향하는 골목길 입구입니다.
서울에서 부산에 내려온 지난 1월 이후 두 달을 건너뛰고 맞은 3월 1일인 오늘, 옛 동래부 앞 명륜지구대 옆 길에서 만세 군중들을 재현하는 사람들의 불 같은 함성으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소리를 들은 뒤 나홀로 발길을 돌려 찾은 칠산동, 지금은 '明倫路 98番길 129-10'으로 地番이 바뀐 박차정 의사와 두 오빠 분인 박문희 박문호 의사들의 생가는 오후 3~ 5시 두 시간 내내 나 말고는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인적이 끊긴 그런 곳이었기에 온갖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온 집안 사람들이 日帝에 대항해 분연히 들고 일어났던 명문 독립운동가의 생가에 오늘 같이 뜻깊은 날, 비록 두 시간이었지만 찾아오는 사람 하나 흔적을 볼 수가 없으니 오호 애제( 嗚呼哀哉)라~ 장차 이 염량세태(炎凉世態)를 어찌하면 좋을런지요?....
獨立軍歌 (원곡: Marching Through Georgia)
新大韓國 獨立軍의 百萬勇士야 / 祖國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三千里 三千萬의 우리 同胞들 / 건질 이 너와 나로다
怨讐들이 强하다고 怯을 낼 건가 / 우리들이 弱하다고 落心할건가
正義의 날쌘 칼이 비끼는 곳에 / 이길 이 너와 나로다
너 살거든 獨立軍의 勇士가 되고 / 나 죽으면 獨立軍의 魂靈이 됨이
同志야 너와 나의 所願 아니냐 / 빛낼 이 너와 나로다
(후렴)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獨立門의 自由鐘이 울릴 때까지 / 싸우러 나아가세
조선의용대, 항일투쟁을 위해 화베이(화북) 지역으로 떠나다
조선의용대가 주둔하고 있던 중국 남부에는 한국인 수가 적어 지원자 모집이 어려웠다. 의용대 내부에서는 동포들이 많은 황하 이북으로 이주하자는 여론이 거세졌다.
화베이 행을 결정한 조선의용대는 1941년 초부터 300여 명의 본대 중 100여 명을 먼저 태항산 일대로 이동시킨다.
의열단 시절부터 김원봉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석정 윤세주와 조선의용대의 핵심간부인 박효상, 이춘암 등도 이때 함께 떠났다. 산시성 쭈어챈현은 중일전쟁 당시,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 129사단이 주둔하며 일본군과 대치했던 격전지였다.
당시 국민당 정부는 항일에 소극적이었고, 항일전선이 형성된 곳은 주로 팔로군 주둔지였다. 조선의용대원들은 1941년 여름, 팔로군과 함께 항일유격투쟁을 펼친다. 일본군과의 전투에 목말라 있던 조선의용대가 팔로군에 합류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조선의용대 주력이 떠난 후에도 김원봉은 본부대원들과 함께 충칭에 남아 있었다. 국민당 정부가 있는 충칭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