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康永喆 - 不死鳥(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1966 지구 LM-120112)..이 목숨 바칠 것을 다짐한 사랑 이 세상 다하도록 맹세한 사랑, 음∼ 내 사랑은 불사조 변함없는 불사조

고향모정 2024. 6. 8. 22:11

2009.04.24

(1966 지구 LM 120112) 백영호 작곡집 - 不死鳥 / 東淑의 노래
영화 '不死鳥' 최후전선180리 주제가


1. 불사조/ 강영철
2. 꽃 피는 여수바다/ 이미자
3. 집 없는 서름/ 강영철
4. 봄은 오는데/ 이미자
5. 추억의 진주/ 남강수
6. 떠나렵니다/ 문주란

1. 동숙의 노래/ 문주란
2. 최후전선 180리/ 쟈니부러더스
3. 봄이 오는 고갯길/ 문주란
4. 첫사랑이기에/ 남상규
5. 아름다운 황혼/ 박재란
6. 추억만 남으리/ 후랑크백

고향모정 (2009-04-24 22:52:30)

康永喆은 平壤 출신의 유명가수로 戰後 일본에서 동양 최고의 크루너 가수라는 칭호를 들은
대가수이지요.(日本名 '오바다 미노루..小畑 實')

康永喆은 平壤 출신의 유명가수로 戰後 일본에서 동양 최고의 크루너 가수라는 칭호를 들은 대가수이지요.(日本名 '오바다 미노루..小畑 實')

해방 이후 일본과 수교가 되어 있지 않아서 굳게 닫겨져 있던 문화 교류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1961년도 이후 동경올림픽이 열린 1964년 그해에 '아카시아에 보슬비 내리는 밤'을 불러 유명해진 재일교포 가수 李順愛가 우리나라에서 동명의 우리말 번안가요와 '모국이여 안녕'이란 노래로 첫 번째 레코드를 낸 이후, 1966년도에 康永喆이 영화주제가인 이 不死鳥를 부른 것으로 그 최고의 정점에 도달한 셈이지요..
오늘은 이 역사적인 노래에 관련된 註釋을 이 글 다음에 소개합니다만 긴 글이 다소 지루하드라도 재일교포 가수들에 대해서 심심파적 공부하는 기분으로 읽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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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일본 노래를 듣다 이상한 생각이 나서 다시 한번 살펴봤다.  그랬더니 "간따로 월야패(月夜唄)"와 "부계도(婦系圖)의 노래" 2곡이 "오바다 미노루(小畑 實)"노래로 되어서 급히 찾아봤더니 역시 한국명 "康永喆"의 일본 이름이었다. 어쩐지 맑고 깨끗한 소리다 싶더니.. (그를 일컬어 동양 최고의 美聲 가수, 최고의 크루너 가수라고 한다)
갑자기 그의 노래 "不死鳥"를 다루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부랴부랴 자료를 뒤지고 끙끙대며 썼는데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글이지만 일본 노래와 연계하여 읽어주면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이 시대 천박한 사랑을 꾸짖는 천상에서 울려오는 不死鳥의 純愛譜 -

 

<不死鳥>
작사 : 한산도
작곡 : 백영호
노래 : 강영철

1.

이 목숨 바칠 것을 다짐한 사랑
이 세상 다하도록 맹세한 사랑
두 갈래 갈림길에 서성거리며
한없는 그리움에 가슴 태우는
음∼ 음∼ 내 사랑은 불사조 변함없는 불사조

2.

헤어져 살더라도 내가 왜 잊어
긴 세월 흐른대도 내가 왜 잊어
마음과 마음으로 굳게 맺어진
그대는 나의 아내 영원한 아내
음∼ 음∼ 내 사랑은 불사조 변함없는 불사조

1. 인간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인간은 시간 속의 존재다. 인간뿐만 아니라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시간이란 조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탄생은 시간이란 원죄를 인정하고서의 축복일 뿐이다.
시간은 不可解다.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감지할 수 없는 인식 이전의 절대의 세계다.

그런데도 그 세계는 그저 우리 옆에 무심히 널려 있다.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처럼 세월은 우리와 함께 울고 웃으며 늙어간다.

맘씨 좋은 옆집 아저씨처럼.. 하지만 시간은 절대 우리와 함께 가지 않는다.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면 시간은 우리를 저 한없는 억겁의 지층으로 밀어 넣고 또 다른 동행자를 찾아간다.

지나간 우리를 절대 기억해주지 않는다.

열역학적 시간은 절대 반대로 흐를 수 없다. 바닥에 떨어져 깨어진 유리들이 모여 잔이 되고, 물이 담겨 책상 위로 올라가고, 물이 거꾸로 물통으로 들어가고… 그런 시간을 거스르는 현상은 생각만으로도 불경스럽다.

시간은 모든 철학자들이 달려들어 해부했지만 그 실체는 전혀 없는 현상으로서 뿐이었다.

시간은 불가해한 괴물이다.

인간은 그런 시간 속의 존재다.

일정 부분만 살고 있는, 하지만 그 일정 부분도 시간이란 불가해에서 보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주적 시간 속에 개개 인간이 차지하는 시간은 없는 것이 된다.

일생을 100년이라면 우리가 간단히 말하는 백만, 천만 년… 지질 시대의 몇 십억 년은 도대체 몇 번 되풀이되어야 한단 말인가? 수학적 계산은 아무 필요 없다. 100년이란 시간과 거기에 얹혀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해한 시간 단위에서는 의미가 없다. 존재는 없는 것과 같다. 참으로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동시에 그 허망을 초월하는 방식으로서 역사의 연쇄법을 만들어냈다. 자손을 만들고 그 자손이 또 자손을 만들고… 우리는 비로소 시간을 거역하고 존재한다는 것의 위대함을 널리 선포한 것이다.

개체로서는 종말이지만 종으로서는 영속적인 생명의 과정으로 마침표 없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서 불가해한 절대의 시간을 이겨내는 감격의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생물적 연쇄는 인간이라는 존재 방식과는 다른 물리적 법칙일 뿐이다.

우리 인간은 돼지처럼 그저 생물적 연속만으로 살지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를 인지하는 사고가 있다. 상황 속에서의 존재의 값을 이해하고 자신의 행동을 창조적으로 결정하는 존재다. 돼지처럼 본능으로서 역사를 이어가지 않는다.
우리는 그러므로 인간답게 살아갈 의무가 있다. 개나 돼지처럼 물리적 영속으로 역사를 만들 수는 없다.

인간은 사고를 통해 그 삶의 역사를 개척해나가야 한다.

그 삶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쉽게 단정지을 수 없는 철학적 성찰을 필요로 하는 질문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누구나 당연히 인정하는 것으로써 결론이 나 있다.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사회를 형성하고 서로 교류하며 인류의 터전을 가꾸어나가는 원리는 사랑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스스로가 그 터전의 한 구성원이 되고 다른 사람들의 구성원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만약 사랑이 구성 원리가 되지 못한다면 인류의 터전은 성립할 수 없다.

만약 그래도 성립한다면 기계처럼 주어진 부속품으로서의 기능으로 전락하고 눈앞에 보이는 세계의 삭막함에 숨 한 번 쉬어보지 못하고 질식할 것이다. 내 주위의 사랑이 없는 기계적 물질 같은 로봇 인간이 가득하다면 말이다.

그런 사랑의 형태 중 가장 강렬한 것은 가족과 피의 연결로서의 사랑이다.

내 피를 이어받는다는 것은 내 분신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그런 분신들의 집합으로서 가족은 사회 구성의 가장 기초 원리가 된다. 그 구성원들은 전적으로 사랑을 먹고산다. 사랑이 없으면 전혀 성립할 수 없다.

사랑은 거짓이 아니다. 사랑은 진심이다. 사랑은 완벽하다. 내 가족, 내 아내, 내 남편, 내 부모… 사랑은 희생이다.
하지만 인간은 불행히도 전적인 진심으로 살지 못한다. 완벽하지도 못하며 희생하지도 않는다. 그런 것들은 이상일 뿐 현실은 차라리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이상은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이상은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이다.

현실은 인간의 이상을 간단히 제압한다. 현실 자체는 저기 있다.

다양한 모습과 몸짓, 치장을 하고 문 앞에서 우리를 맞는다. 우리의 선택과 관계없이 그 손길을 함부로 내민다.

우리는 제각각 다른 현실들과 만나며 이상이 허상이며 신기루임을 깨닫는다. 혹은 조국을 잃는 거대한 현실에서부터 폭풍을 만나 비명횡사하는 현실을 맞을 수도 있다. 병으로 자녀를 잃는 슬픔을 맞기도 하고 강도에게서 횡액을 당하기도 한다.

우리는 현실이라는 세상에서 갖가지 펀치를 맞고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현실이라는 강력한 도전자에게 백전백패를 거듭한다.

그러나 사랑은 본능이다. 현실의 강력한 백태클에 넘어지면서도 우리는 사랑을 잡으려는 본능을 버리지 못한다. 평생을 모은 재산을 사회에 기증하기도 하고, 멀쩡한 청년이 뇌성마비 여인과 결혼하기도 한다.

현실은 마냥 태클만 걸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런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들도 풀어내는 것을 보면...

인간은 그런 아름다운 사랑을 키워왔다.

현실만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을 풍성하고 아름답게 키워내는 게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사랑의 율법을 인생에 덧씌웠다.

흑백 시네(마)스코(프)인 ‘不死鳥’는 그런 사랑의 변증법을 생각나게 하는 영화와 그 주제가로 기억된다.

비록 19세기 일본 베스트셀러 ‘不如歸’의 현대 번역물인 통속적 소재지만 짜임새 있는 전개가 여성 관객의 눈물을 자아냈다.

-삼대 독자인 신성일은 명문가 김희갑의 딸인 고은아와 결혼한다.

어머니 황정순은 어서 빨리 손자를 보고싶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쓰러진다. 병원에 가서 폐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아내의 손을 잡고 꼭 일어날 거라며 위로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의 장래와 손자를 얻기 위해 이혼하기를 명령한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은 병든 아내를 버릴 수가 없어 반대한다.
그런데 아들이 출장을 가게 되었다. 그 사이 어머니는 병든 며느리를 친정으로 보낸다.

그리고 새로운 며느리감을 고른다. 출장에서 돌아온 아들은 어머니에게서 아내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절망한다.

그는 장인 집으로 찾아간다.
그러나 죽은 줄 알았던 아내가 살아있는 게 아닌가?

아내는 그의 가슴에 파묻히며 당신의 행복을 위해 떠나는 나를 원망하지 마라,

나는 당신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으리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진다.

그는 아내를 끌어안고 한없이 당신을 사랑하리라고 소리친다.
그 위로 노래가 울려 퍼진다.

이 목숨 바칠 것을 다짐한 사랑.
이 세상 다하도록 맹세한 사랑∼

밤거리를 방황하는 그에게 夜花들이 다가온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대는 나의 아내 영원한 아내,
음∼ 음∼ 내 사랑은 불사조, 변함없는 불사조

지금의 감각과는 차이가 많이 나지만 그러나 이 영화와 노래의 주제는 사랑이다.

특히 부부간의 사랑의 애틋함과 숭고함이 절실하다.

현실이라는 많은 태클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찬란한 빛을 내며 다가온다.

현대인의 키워드는 사랑이 아닐까 싶다.

너도나도 사랑을 이야기하고 사랑의 찬가를 부르고 있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사랑은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생활에 깊이 뿌리내린 현실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사랑의 의미가 예전과 같은 뜻을 가졌을까? 지금도 영화와 노래의 사랑이 유효할까?

현대는 문자 그대로 사랑이 넘쳐 홍수를 이룬다.
노래는 온통 사랑타령이다. 사랑과 이별은 마치 통과의례처럼 함부로 읊어진다.

쉽게 사랑하고 더 쉽게 떠난다. 그게 사랑일까?
영화는 사랑을 발가벗긴다. 젖소 부인으로 상징되는 육체의 욕망이 화면에서 꿈틀거린다. 한바탕 육욕의 신음이 끝나고 나면 동물들처럼 제각각 따로 간다.
TV는 신선한 성적 상상력이라면서 무차별적으로 섹스의 코드를 쏘아대고 그걸 보며 사람들은 낄낄거린다. 코미디적인 언어 유희에 다름 아닌 유행어로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며 무슨 진리처럼 내뱉는다.
책은 벌거벗은 性合이 난무하고 인터넷은 가히 포르노의 천지가 된 지 오래이다. 더욱이나 배운 사람들이 섹스를 더욱 요란스레 포장한다.

性을 ‘개인의 파토스적인 願望’이라고 그럴 듯하게 묘사하는 건 약과고 ‘숨타는 아름다움을 주는 性慾’이라고 대담하게 토로한다.

나아가 ‘성욕은 아름다움에 대한 본능적 희구’이며, 그것을 억압하는 이성이란 ‘나약한 인간이 자신의 수치심을 감추어 숨기기 위해 마련한 교만일 뿐’이라며 제법 사회철학자 같은 말까지 함부로 내뱉는다.

보지도 읽지도 않았지만 ‘거짓말’같은 영화와 ‘때로는 나도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따위 난잡한 성 고백록 같은 책들이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그걸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되는 양, 지난 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이 땅의 한 에로스가 구성되고 발휘되고 좌절되고 자신을 의미화 하여온 과정의 기록이라며 갑자기 흔해빠진 문화 비평가인가 뭔가 하는 사람들이 찬양한다고 야단이다.

‘범죄적 성욕으로 점철된 타락의 성장사’이며 ‘감출 수 없는 불결한 오르가즘의 시말서’에 다름 아닌 그런 것들을 에로스의 권리장전 쯤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거리는 온통 사랑이 넘쳐나고, 밤마다 유흥가는 사랑의 배설로 북적거린다.

이 노래를 들으면 그런 性으로 도배된 사랑의 허상이 깨끗이 녹아내리는 신선함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

처음부터 배음(背音)으로 화음을 풀어내는 여성의 音은 천상에서 운명의 여신이 풀어 내리는 아리아처럼 너무나 신비로워 내 몸 깊이 숨겨 둔 욕정을 하나도 남김없이 녹여낸다.

그리고 이어서 울려오는 강영철의 소리는 가슴에 녹아 있는 찌꺼기를 씻어내 맑고 깨끗하게 만든다.
채규엽으로부터 시작되어 남인수에게서 활짝 개화한 섬세하고 맑은 고음을 강영철이 이어받아 음역 구석구석에 깔아 논 섬세한 감성으로 엄청난 자정(自淨) 작용을 한다.
배음과 가수의 음이 이렇게 어울리는 것은 처음이다.
60년대의 대 작곡가 백영호는 신비한 배음과 세정제 같은 강영철의 소리를 절묘하게 병렬하며 그의 숨겨진 걸작을 만들었다.

강영철을 염두에 두고 만들지 않았으면 그런 효과를 얻지 못했으리라.

오늘은 신비한 사랑의 마력을 절절히 토해내는 노래를 듣고 싶다. 그리고 그 마력의 노래 ‘不死鳥’는 오늘날의 사랑의 변증법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노래가 아닐 수 없다
인간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랑인가?

2. 인생은 왜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가지를 않는 것인지요?..

모든 부모는 거의 다 내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지만 그 자식은 비바람을 맞으며 변두리를 헤매기도 하고, 절대 헤어지지 말자던 사람인데 지금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가정을 꾸려 살기도 합니다.

안타깝지만 우리네 인생이 맞이하는 세계는 그렇게 이별로 꾸며지는가 봅니다. 그래서 운명이 만들어지고 인간 사회에 전설이 이야기되는 것은 아닌지.

우리 가요도 그렇게 변두리에서 헤매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고향을 떠나 타향을 돌며 그렇게 사라지는 사람들 말입니다.

멀리로는 2∼30년대 신파 연극 시대의 막간 가수나 가극단원, 40년대 악극단으로서 멀리 중국이나 일본을 떠돌다 사라져간 많은 사람들이 있지요. 그들은 해외 공연으로, 살기 위해 밀항으로, 또는 이민으로 제각각의 사연을 안고 외국으로 흘러갔습니다.

이름난 사람들도 있군요.

미국으로는 심연옥, 백년설, 윤복희, 김 시스터즈 등이 흘러갔고 일본은 손목인, 손석우, 중국에는 현인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다시 돌아오기도 했지만 타향에서 유명을 달리하기도 했습니다.
이름 없는 사람들은 어디에 누가 있는지 모릅니다. 김성옥은 동남아, 인도를 거쳐 유럽으로 갔다고 하고, 로라 성과 곽순옥도 동남아 무대를 뛰고 있다고 하는군요. 이명옥은 필리핀으로, 옥후련은 캐나다로, 송영란 모녀는 홍콩으로, 팝 싱거 프랭키 손은 베트남, 밴드 마스터 강철구는 태국, 송민영과 김광수는 미국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두 다 고국을 떠나 어느 순간 사라져간 사람들입니다.

그 중 어릴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의 가수가 되어 유명해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김영길은 나가다 겐지로(永田絃次郞)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유명한 오페라 가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60년대 중반 동경 올림픽이 개최되고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자 재일 교포 가수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음반들을 취입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순애는 ‘모국이여 안녕’을 불렀고, 박광자는 ‘이별의 서울 정거장’을 불러 꽤 히트하였습니다.

그런 사람 중에 康永喆이라는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평양 출신으로 일찍 일본으로 건너가서 고학을 하며 음악 공부를 하였습니다.

반도 출신임을 숨기고 오바다 미노루(小畑 實)란 이름으로 행세하며 20세 이전에 가수로 데뷔하였습니다.

‘婦系圖의 노래’, ‘간따로 月夜唄’, ‘안녕 高原驛’등을 불러 당대를 쩡쩡 울리는 가수가 되었습니다.

예전에 ‘안녕 高原驛’을 내용도 모른 채 日語 그대로 신나게 부르던 생각이 나는군요.
시와시 와까레노 요기사노 마도요∼

가요계를 은퇴하고 사업을 하다 다시 노래를 시작한 그가 한국인이란 것을 안 우리 나라에서 초청장이 보내오자 귀국하여 康永喆이란 본명으로 ‘不死鳥’란 영화에 특별 출연하였으며 지구 레코드에서 그 주제가도 출반하였습니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서 가수로 활동하며 사업을 하기도 하고 형무소 위문 공연 등을 하다 79년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김두한을 닮은 얼굴에 성격도 시원시원한 협객 타입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은 결국 그도 오늘에서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아무도 이 사람이 한 때 일본 제일의 가수였다는 것을, 그리고 ‘不死鳥’란 노래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몇몇 관심 있는 사람만이 화석처럼 사라진 노래를 부를 뿐입니다.
사람은 결국 시간의 지배를 받는 모양입니다. 그런 면으로 보면 사랑도 당대만 유효한 특효약인 모양이군요.
인간은 과연 어디서 왔으며, 왜 떠돌아다녀야만 하는지, 그리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고향모정 (2009-04-25 00:03:19)
선학산님..
우리나라 가요의 족적을 따라가다 보면 이 노래처럼, 좀 특이한 이력을 지닌 노래도 만날 수가 있어 정말 흥미롭습니다.

제가 30대 때, 이 노래를 즐겨불렀던 저보다 한 살 많은 제 직장 동료가 있었는데 그이의 목소리가 강영철 님의 맑은 이 목소리와 너무나 흡사해 저도 같이 따라서 몇 번 기교를 부려서 자주 부르던 노래였었습니다.
1980년도의 가라오케 노래책 목록에는 들어있었는데 잘은 모르지만 지금의 노래방 목록에는 짐작컨데 아마도 이 노래가 들어있지가 않을 것도 같은데요..
고향모정 (2009-04-25 00:55:34)
Crooner (크루너) 歌手->
低音의 부드러운 美聲으로 달콤하고 감상적인 노래를 부르는 가수를 뜻하는 말이라고 하는군요..

강영철 선생과 관련된 이야기는 같은 재일교포 가수 '미소라 히바리'만큼이나 극적이나, 선생이 일찍 타계하는 바람에 재일교포 歌謠史가 그냥 단절되다시피 하였습니다.
선생처럼 고국에서 우리말로 노래를 부르고 韓國人임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지만 '미소라 히바리'처럼 거의 대다수의 재일 가수들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溫故知新 (2009-04-27 12:06:27)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사회를 형성하고 서로 교류하며 인류의 터전을 가꾸어나가는 원리는 사랑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스스로가 그 터전의 한 구성원이 되고 다른 사람들 역시 구성원이 될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만약 사랑이 구성 원리가 되지 못한다면 인류의 터전은 성립할 수 없다.”
모정님의 性情을 가감 없이 드러낸 위의 구절을 대하고 박애의 문인 톨스토이를 떠올립니다.

톨스토이는 그의 단편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하느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아 날개를 잃고 지상에 내려온 천사 미카엘을 통하여 “인간은 자기 자신의 안위와 행복을 걱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타인을 측은히 여기고 또 보살피는 사랑이 있기에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을 알립니다.

이기심과 에로스가 아닌, 모정님의 글 전반을 관통하는 이타심과 아가페가 넘치는 삶과 세상을 기원하면서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의 귀결점은 사랑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합니다.

모정님의 문재를 질시하는 감기로 부터 한시 바삐 벗어나기를 빕니다.
고향모정 (2009-04-27 21:17:43)
낮에 주신 전화, 정말 반가웠습니다.

러시아의 大文豪 '톨스토이'의 短篇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제가 고등학생 시절에 한 번 읽어본 책인데 지금은 기억이 영 가물가물하군요.
시인 장정일이 쓴 讀書日記를 몇 년 전에 읽은 적이 있었는데 저도 이제 지금부터라도 읽는 책은 꼭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라는 생각을 하여봅니다.

제가 학장동으로 옮겨온 관계로 앞으로는 지금보다는 자주 만나뵐 수 있을 것 같은 좋은 조짐이 있어 정말 기쁩니다.
오늘은 감기는 많이 나아졌습니다만 쓸데없는 걱정을 끼쳐드려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