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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규 - 연탄공장 노총각 (金相奎- 煉炭工場 老總角/1965 한일레코드- HL No.2015)..나의 이름 연탄공장 노총각이요, 하루 종일 작업하면 검어집니다~

고향모정 2023. 12. 19. 20:33

 

이렇게 살 떨리는 嚴冬雪寒 추위에는 이만큼 따스한 호사가 따로 없지요..

故鄕母情  2013-01-05 10:47:18

 

정말 춥군요..
요근래 며칠동안 이렇게 거세게 돌격 앞으로~

冬將軍의 서슬퍼런 기세가 맹위를 떨치는

살 떨리는 嚴冬雪寒 융동(隆冬)추위를 맞고보니

과거 이토록 끔찍하게 추웠던 시절을 살았던 날이

과연 그 언제였던가 하고 생각도 하게 되네요.

50~60년대의 겨울은 지금처럼 넉넉한 나라 살림으로

추위를 막아주는 사회간접자본과 시설이 턱없이 모자랐던 시절이었는지라

겨울 난방에 드는 수고를 농촌에서는 고추달린 남자 아이들이라면

어김없이 山으로 베낭 대신 지게를 진 生活山行으로 땔감 마련을 하였고,
그나마 나무하러 지게지고 山을 오를 일이 없을 것 같았던

도시에 사는 아이들마저도 이 노래에 나오는 연탄 때문에

다들 손 더럽히는 날품을 팔았던 경험이 있었으리라고 봅니다.

 

그 시절, 미닫이문 문지방 틈새 窓戶紙를 바르르 떨리게 울리고

덜컹~ 禁風의 방안으로도 무례하게 불쑥 들어와 대책없는 우리들 뺨을

그냥 사정없이 때리던 그 혹한의 엄동설한 불청객 시베리아칼바람에도

우리의 든든한 빽이 되어 온밤을 새워가며 우리를 지켜주었던 온돌방 한 구석..
바람이 다시 뺨을 때리기 위해서 몸을 재차 일으킬 때 이번만큼은 당하지않지~
냅다 얼굴을 묻거나 아예 숨어버리던 남쪽나라, 사계절 따뜻한 江南이던 그 곳
-구들막이 있는 자리에 펼쳐져 있던 무명이불 밑-..

 

그 시절의 그 따스했던 江南, 아랫목 이불 밑 뜨듯한 溫氣를 아직도 기억하신다면
이 고마운 연탄에게 敬意를~!!
그리고 이 노래의 당당한 노총각처럼 공장에서 연탄을 만들고,

또 만들어진 그 연탄을 비탈길 오르막길 지게에 얹어 허덕허덕 고단한 발걸음에도

땀흘리며 묵묵히 배달하셨던 모든 연탄 아저씨 아주머니 처녀 총각들에게,

그리고 지금도 현업에서 여전히 추운 이웃을 위해 일하고 계시는 마음 따뜻한

아름다운 모든 분들에게도 역시 이 노래를 바칩니다...

 

덧붙혀 이 노래처럼 뚜렷한 애정을 가진 멋진 '연탄에 바치는 송가(頌歌)'인

안도현 詩人의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

참 당차고 멋진 일갈(一喝)~!..

그렇습니다.

1965년 그 당시 대구KBS전속가수이시던 '김상규' 선생이 부르셨던 이 노래,

<연탄공장 노총각>의 당찬 호기(豪氣)가 후일 詩人 '안도현' 님에게

기분좋게 전이된 것은 아닌지 어째 쫌~ 아리까리 합니다마는...

 

金相奎 - 煉炭工場 老總角

金相奎 작사 / 金相烈 작곡 

 

1.

나의 이름 연탄공장 노총각이요

아침 해가 솟을 때면 일터로 가서

하루 종일 작업하면 검어집니다

원투피스 아가씨들 내 얼굴 보고

고운 인상 찌푸리며 달아나지요

그래도 마음만은 그래도 마음만은

결백합니다

 

2.

나의 이름 연탄공장 노총각이요

힘줄 솟은 팔뚝에는 건강이 넘쳐

내일 위해 오늘 하루 바치렵니다

겉을 보고 속 모르는 맹꽁아가씨

검다해서 너를 위한 순정 없으랴

여보세요 냉수 마셔 여보세요 냉수 마셔

마음 돌려요

 

3.

나의 이름 연탄공장 노총각이요

기운차게 돌아가는 엔진 소리에

나도 몰래 오늘 해가 저물었어요

밤이 오면 곤색 싱글 갈아입고서

피로했던 몸과 마음 회복합니다

아가씨요 정신 차려 아가씨요 정신 차려

나를 따르요   

 

(1965 한일레코드- HL No.2015) 김용해 - 이국땅 전선의 밤,

연탄공장 노총각(김상규) 

 

1. 이국땅 전선의 밤 (김용해)
2. 아이러브유 미쓰 리 (최현일)
3. 한 많은 화류계 (남백송)
4. 낙엽 하나 나 하나 (고화성)
5. 로맨스 메모리 (태구남)
6. 이별의 선창 (홍주란)

 

1. 흘러간 물망초 (김용해)
2. 돌채의 밤 (남궁)
3. 연탄공장 노총각 (김상규)
4. 죽령고개 삼천리 (황영자)

5. 불효자는 빕니다 (태구남)
6. 꿈은 내 고향 (김용해)

 

 대구 지방을 중심으로 왕성하게 활동한 김상규 선생님이 이 노래를 불렀던 시기를 저는 대략 60~62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이 SP음반, 10인치 LP음반에 64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12인치 LP음반 출시와 맞물려 음원관리가 뒤죽박죽이 된 혼돈의 시기라서 사실 연대 확인이 참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제가 취입연도 표기를 하지 않고 레코드 발매연도를 적은 이유도 저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 당시는 노래를 한 번 취입하는 것이 쉽지 않을 때라서 한 번 취입한 곡은 그 후로도 레코드를 제작할 때 그냥 그대로 옮겨갔는데(편집음반) 이 노래도 그와 같은 과정을 거쳤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나마 김상규 선생님은 기록이 남아있는 편이라서 찾기가 쉽습니다.
오래 전의 신문(영남일보 2003년 7월 31일 이춘호 기자)을 보고 김상규 선생님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알았습니다.

작곡가 이병주 선생님이 사장으로 있던 오리엔트레코드사가 50년대 중반 시민극장에서 주최한 가수 선발 콩쿠르와 인연이 돼 가수의 길로 접어들었는데 정작 콩쿠르에서는 3등 밖으로 밀려나자 불편한 심기를 안고 심사위원장이던 이병주 선생을 찾아가 심사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고 그게 인연이 돼 이병주가 발탁해 가수가 되었습니다.
이후 대구KBS전속가수로 있으면서 이 노래와 58년 김용만이 불렀던 '국산연초아리랑'을 불렀다고 하며, 63년에 대구연예협회 사무국장이 되었다고 하니 가수로서 왕성한 활동을 했던 시기는 50년대 말~62년 경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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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었느냐?

 

 

연탄 한 장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專門家 (2013-01-05 20:29:55)
고향모정님!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예년에 볼 수 없던 강추위가 모두를 쫄게 하는데 그간 건강히 잘 지내셨는지?
오랜만에 모정님의 반가운 글을 보게 되는군요!

'70년대만 해도 양반이고 5, 60년대는 지금의 추위를 뺨치는 혹한이
해마다 이어지곤 했지요.
그 시절엔 오로지 연탄과 장작만이 난방을 위한 연료였습니다.
지기네는 가을이면 장작을 한도라꾸 실어다
뒤꼍에 산더미 같이 쌓아놓고 그걸로 겨울을 나곤 했지요.
당시엔 학교길도 어린 나이로는 무리인 십리가 넘어 정말 추웠습니다.

덕분에 그 옛날을 회상하며 모정님의 "연탄예찬"을 노래와 더불어 즐겁게 잘 감상했습니다.
지기네도 '60년대 후반부터 연탄을 사용하기 시작햇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연탄의 고마움을 알리가 만무하지만 오늘 글로 속이 시원합니다^^
회원님들과 함께 감상토록 하겠습니다.
감사드리며 편안하고 포근한 토요일 밤 되시기를!... ^^
고향모정 (2013-01-06 23:37:58)
정말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특히 전문가님께는 미안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구요..
그간의 안녕을 묻는 문안인사가 단 몇 자의 글로 여쭙는
이 결례도 널리 해서(海恕)하시길요..

신년들어 세운 계획 중의 하나로 그동안 꼭 하리라고 마음을 먹고 있던
노래 파일을 정리하는 과정에, 마침 요즘 날씨에 완전맞춤노래인
이 노래가 있어서 곡 소개를 겸해 제나름의 해석을 달았습니다.

또한, 서울에서도 장작불로 겨울을 나셨다는 말씀에 묘한 동질감을 느낍니다.
저는 괭이, 도끼를 들고 산에 올라 벌목으로 밑둥만 남은 고목그루터기
(경상도 사투리로 '까딩이, 까둥구리')를 캐고, 찍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반갑게 맞아주심에 다시 한 번 더 정중히 인사 올립니다.
추운 날씨에 保重하시길 빕니다.
 선학산 (2013-01-06 12:09:39)
모정님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해도 항상 건강하시고 기운찬 새해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ㅎㅎㅎㅎ
오늘 모정님께서 우리네 옛시절을 회상하게 하는 좋은 글을 올려주셨네요.
글을 읽다 보니 자연스레 저의 어린시절, 그 때가 스캐닝됩니다.

60년대 초, 아마 5.16이후 정부에서 가정의 아궁이 개량사업을 하라는 정책이 있었던지

어느날 저의 아버지께서 당시 우리집 1층의 두 아궁이를 한 쪽은
연탄( 화덕을 레일을 깔아 밀어 넣고 빼는 형태)아궁이로 또 한 아궁이는 석유 바나로 데우는 아궁이로 개조하셨지요.

처음 당시 연탄은 공장에서 만든 제품이 아니고 사람이 직접 손으로 만드는 형태였고 그것도 연탄을 사러 간 사람이

직접 만들었습니다.

우리집 경우는 내 바로 위 형님이랑 연탄집에 가서 10장 분량의 돈을 주고 옆에 만들어 놓은 연탄 반죽을 쇠뭉치 틀에

손 삽으로 담은 뒤 쇠뭉치 틀을 닫고는 쇠망치로 틀위를 수십차례 내려 쳤습니다.
그런 후 틀을 풀어 연탄 한 장을 만드는데 ,
내나 형님이나 아직 힘이 모자라 틀을 풀면 연탄이 주저 앉는 바람에 연탄 한 장 만드는데 어찌나 힘이 들었던지요.
대게 연탄 사러 온 어른 들께서 도와주셔서 겨우 만들어 형님과 들고 집으로 왔습니다.

생각에 1964년 경부터 삼천리표 공장 연탄이 보급되기 시작한 것 같은데 그동안 수연탄 만든다고 어찌나 힘들었던지.
그리고 석유바나 때문에 겨울이면 집에서 약 2Km 떨어진 석유집까지 가서 한 말을 사 오너라 겨울바람 맞으며 수고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수고 덕분에 온돌방 아랫목이 따뜻해 지면 이부자리 속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마냥 행복한 생각에 잠기곤 했지요.

엊그저께 뉴스에 올 추위가 45년 만의 추위라 해서 얼핏 계산해 보면 45년 전은 대략 60년대 중반인지라

역시 당시 겨울이 춥긴 추웠나 봅니다.
그랬기에 저의 고향집 옆의 낙동강이 꽁꽁 얼었으니까요.

연탄이 보급되면서 자고 일어나면 연탄중독 때문에 사고가 발생했다는 소식도 심심찮게 들리곤 했습니다.
그러면 동치미 국물을 먹으면 좋다고들 하면서 겨울을 나기도 했지요.
이제 아련히 멀어진 과거지만 가끔 이런 추억을 되집어 보면 우리가 언제부터 이런 호강을 하고 살았나 싶기도 합니다.

근데 오늘 나오는 노래는 생전 처음 듣는 곡입니다.
당시에 연탄 예찬 노래도 있었군요.

모정님 새해는 뜻한 바 일들이 잘 풀리고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좋은 글과 노래 추억과 함께 합니다....
고향모정 (2013-01-07 00:27:09)
여전히 반갑게 맞아주신 선학산 형님께 정중하게 인사드립니다.
또한 긴 글로써 그 겨울날들의 풍경들을 낱낱이 풀어서 마치 細密畫 素描처럼
엮어주신 정성에는 그저 감사하다는 말 밖에는 더 드릴게 없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저도 좀 색다른 인사...,

"과년 기체후일양만강 옥체보중하옵시고 가내만복 만사형통하오셨는지요?"
(허허~ 요즘 이런 인사말로 문안 묻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싶어
그 옛날 할아버지 제자분들이 새해 인사에 와서 세배하면서 귀동냥으로 들은
풍월을 그냥 한 번 古語體로 흉내내어 보았습니다.)

덕분에 연탄의 여러 얼굴을 접하고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옆에 만들어 놓은 연탄 반죽을 쇠뭉치 틀에 손 삽으로 담은 뒤
쇠뭉치 틀을 닫고는 쇠망치로 틀 위를 수십차례 내려친" 수타작업으로 연탄을
만드셨다는 고증까지 하여주셔서 저로서는 실로 엄청난 것을 또 하나 알게 되었으니
저도 이 노래를 선곡해 올린 보람이 제법 솔솔~하군요..

그런데 이 노래의 가사 중에 그 시절에는 몰라도 요즘 정서에는 맞지 않는
몇 개의 억지상황 설정과 선 굵고 거친(?) 생경한 표현이 옥의 티로 보입니다.
곤색 싱글, 아가씨여 정신 차려... 이런 표현..(이건 순전히 제 주관...)
선학산 (2013-01-08 17:54:35)
모정님 글을 다시 한 번 읽어보려고 왔습니다.
모정님 글에는 추억이 아련히 서려 있기에...

당시에 파란색이란 색을 곤색이란 말로 많이 사용했지요.
아마 일본어가 아닐까요? 요즘은 거의 사용치 않죠.

다시금 잘 듣고 잘 보고 갑니다. 땡큐~~~
 영섭 (2013-01-06 07:27:41)
엄동설한..요즘 많이 춥긴 합니다. 하지만 문돌쪽이 손에 달라붇는 경험은 ?
없는듯 합니다. ..귀한 노래와 함께 잠시 추억을 감히.. 더듬어 봅니다.^^
 고향모정 (2013-01-06 23:55:11)
영섭님, 반갑습니다.
요즘도 물론 열심히 사진 작업을 하시겠지요?
아니, 영섭님도 문고리에 손이 쩍쩍~ 달라붙는 경험을 하셨군요..
저는 할머니께서 툇마루 끝에 놓고 가신 할아버지 세숫물을 할아버지가 얼굴을
닦고 나신 그 물에다 다시 세수를 하고선 부리나케 문고리를 잡으면 십중팔구
손이 쩍 달라붙는 경험을 했답니다.
인사 주셔서 고맙습니다.
석진경 (2013-01-12 09:09:50)
고향모정님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는지요?
저희는 주로 19공탄을 많이 사용했던것 같습니다. 눈이 많이 왔을때
에는 다타고 남은 연탄을 언 땅에 뿌려 미끄러움을 방지 하기도 했
지요 연탄 노래와 함께 추억의 글 감사하게 일고 갑니다. 건강 하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