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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실 - 스텐카라친, 그리운 그 봄날의 물살 소리여

고향모정 2023. 9. 15. 00:28

스텐카라진, 그리운 그 봄날의 물살 소리여

2005/03/13 

 

 봄날이여 어서, 어서 오라고 부르는 요정 사이렌(Siren)의 청아한 목소리여...

기쁘다! 봄을 맞은 볼가江의 물 소리여...

 

스텐카라친 - 이연실

앨범 :이연실 - 총결산집 (반지)

 

1. 넘쳐 넘쳐 흘러가는 볼가강물 위에 스텐카라진 배 위에서 노래소리 들린다

 

2. 페르샤의 영화의 꿈 다시 찾은 공주의 웃음 띠운 그 입술에 노래소리 드높다

 

3. 동편 저쪽 무리에서 일어나는 아우성 교만할손 공주로다 우리들은 우리다

 

4. 다시 못올 그 옛날에 볼가강물 흐르고 꿈을 깨친 스텐카라진 외로웁다 그 모습.

 

글쓴이 : candylips 고향의 모정

 

언제이던가!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맑고 깨끗함'은 어릴 적 부터의 저의 話頭였었고 철이 들어갈수록 그 思慕의 깊이는

천석고황처럼 더욱 더 깊어지고 간절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맑은 하늘에 接神할 수 있는 노래'를 찾았습니다.

'포크 송'을 접하고 나서 잠시 사치(奢侈)를 이야기 한 적이 있었을 때,

"이연실"이라는 이름은 정말 뱃사람들의 혼을 뺀다는 妖精 '사이렌'의 이미지로

저에게 그렇게 다가 왔습니다.

드디어 맑은 영혼과 接神할 수 있을 것 같은 영매(靈媒)..,

너무나 맑고 청아하여 그 목소리에 손을 베일 것 같은 '사이렌'을 만났습니다.....

늘 정성으로 답해 주시는 **님. 관심 주시는 만큼 잘 꾸며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저의 첫 작품이니 만큼 행여 마음에 들지 않으시더라도 이해해 주셨으면^^*

2005/03/13

글쓴이: 고향의모정

 

고향모정님...이연실을 실어 주셨네요...

꽤 철이든 다음이었음에도 이연실의 "찔레꽃"을 들으면서 돌아가시지도 않은

엄마의 무덤을 상상하며 눈물 쾅쾅 쏟아내며 청승을 떨었더랬지요...

어쩌지요...오늘 모정님이 처음 데뷔하신 날인데 전 떠남을 생각하니요...

하나를 알면 그 하나밖에 모르는 지독한 "집착증"이 있어요.

살아가는데 하나의 도움은 커녕 오히려 마이너스만 가져온걸 몇번이나 경험했으면서도요...^^

내 살아오면서 내 가슴 가득히 언제나 날 울게하고 웃게했던 단어... "그리움" "고향".....

고향을 북에 두고온 사람들은 언제고 통일이 되면 볼 수도 있겠으나 (그 세월 너무 길었지요..?)

물속에 잠긴 고향은 어디가서 다시 볼까요...?

내 놀던 옛동산을 다시 찾은 지난 여름...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 "고향"....

영원히 그리움으로 간직하기엔 "그리움"이란 그 단어조차 언어의 사치같았던 그 허망함이란....

"고향" 과 "엄마"를 다시 내 마음속에 정렬시켜주신 님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본 "단장"의 그 심정도 함께 느낄 수 있었던 님께

남다른 "애정"마저 드리면서요...

늘 건강 챙겨 사시고....

2005/03/14

 

**님. 그리운 이름이 있어 길을 따라 나섰습니다.

발이 부르터고 영혼이 아파할 때 까지 걸어가 보았지만 정작 거기에는 내가 찾는 그리운 님은 없고,

내가 정박할 수 없는 그리움 하나가 새로 더 있어 오는 길에 문득 퍼담아 가지고 왔습니다.

이제 곧 날이 풀리면 아쉽지만 애써 퍼담아 온 새로운 그 그리움을 봄 물살 속으로 내보내고,

어쩌면 나도 한 번 그 물살을 따라나서 볼 작정으로 있습니다. 건강하시길^^*

2005/03/14

글쓴이: 고향의모정

 

고향의모정님이시로군요. 못 알아봤습니다. 이연실을 못 잊고 계시는군요.

2005/03/14

 

***님. 이제야 첫걸음을 떼었습니다.

앞으로 길을 가다 보면 분명히 '소(牛)도 보고 중(僧)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방에서 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나갈 수가 없듯이, 사람이란 길을 밟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誰能不由戶 向莫由斯道也)">..  '孔子'님 말씀이였습니다.

-candylips, 붉은 입술 드림

2005/03/15

글쓴이: 고향의모정

 

바실리 수리코프(Vasili Surikov, 1848~1918) <볼가강의 스텐카 라진(Stenka Razin)> 1906,  Oil on canvas

 

 

[펌글]

 

"동편 저쪽 물 위에서"라는 가사는 "돈 코?(돈강 유역의 코사크족 혹은, 카자크족)의 무리에서"라는 가사가 와전된 가사인 듯 하다고 한다.

스텐카 라진[Razin, Stepan Timofeyevich, 1630?~1671.6.16] 이라고도 한다. 
돈 지방의 카자크의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카자크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증오하여, 무산(無産) 카자크와 도망 농노(農奴)를 규합, 1667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볼가강 하류와 카스피해 연안을 횝쓸고 다녔다.

1670년 다시 볼가로 진출, 강어귀의 아스트라한을 점령한 뒤 북상(北上)하여 볼가 중류까지의 광대한 지역의 농민을 지주와 
관리들에 대항하는 반란에 합류시켰다. 그러나 그해 10월 반란군은 심비르스크(현재의 울리야노프스크) 교외에서 정부군에 대패하여, 라진은 남쪽으로 도망쳐 돈에서 재기(再起)를 꾀하였으나, 이듬해 4월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압송 처형되었다. 이 반란은 러시아 역사상 대규모 농민반란으로서, 그는 민요(스텐카 라진)로도 불리어 오랫동안 러시아 농민의 기억에 남았다.

여름에는 그런 생각이 거의 들지 않는데 지금처럼 늦가을이나 겨울만 되면 시베리아와 러시아의 대지가 친근하게 다가온다. 
70년대 이연실이 이 노래를 부를때 기관에서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저리 짜집기 했기에 글과 사진과 노래의 출처를 밝히는게 웃기는것 같아서 고마 그냥 통과^^ 이럴땐 동네장사가 편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1917년 혁명 후, 내전기 백군이 7년에 걸쳐 가장 치열하게 적군에 저항한 격전지로 유명하며, 솔로호프의 노벨상 수상작인 
<고요한 돈 강>의 실제 무대이기도 하다. 그 후 정부의 집중투자로 대규모 공장, 특히 트랙터 공장이 건설되면서 공업지역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계 2차대전 중에 200여일에 걸친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나, 제대로 성한 건물하나 남지 않은 폐허가 되었다. 전쟁후 대대적인 복구작업에 착수해 1950년대에는 세계 제1의 담수량을 자랑하는 볼가강 하류 볼시키시에 유럽최대의 수력발전소가 완공되었다. 값싼 전력을 이용하려는 각종 중화학공업, 군산복합체도 집중적으로 들어서고 러시아의 핵심 공업 지역중 하나로 각광을 받았다.1961년 스탈린그라드에서 볼고그라드(Volgograd)로 개칭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랑하는 여인을 물속에 집어 던진 비운의 영웅 - 스텐카 라진

‘넘쳐 넘쳐 흐르는 볼가 강물 위에 /스텐카 라진 배 위에서 노래 소리 들린다. 
/페르시아의 영화의 꿈 다시 찾은 공주의 /웃음 띠운 그 입술에 노래 소리 드높다. /돈 코사크 무리에서 일어나는 아우성 /교만할 손 공주로다 무리들은 주린다. /다시 못 올 그 옛날의 볼가 강물 흐르고 /꿈을 깨친 스텐카 라진 장하도다! 그 모습.’

일제 강점기에 항일독립군의 애창곡이었던 ‘스텐카 라진’의 노랫말이다. 
구슬픈 곡조의 이 러시아 민요에는 한때 러시아 온 땅을 톺고 지나간 반란의 주인공 ‘스텐카 라진’의 비극적 사랑이 담겨 있다. 1980년대 포크가수 이연실이 번안곡을 부르면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졌다.

노랫말의 주인공 스텐카 라진(1630~1671)은 러시아 남동쪽 돈 강 근처의 부유한 ‘카자크(Kasak, 자유인)’집안에서 태어났다. 
카자크는 개간한 땅에 농사를 짓거나, 숲에서 사냥을 하며 사는 무리였다. 그 틈에 태어난 스텐카 라진의 원래 이름은 ‘스테판 라진(Razin, Stepan)’이었다. 하지만 그는 풍족함을 버리고 가난한 카자크들과 어울리는 바람에 ‘스텐카’라는 속된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17세기 중엽 러시아는 여전히 농노제가 시행되는 낙후한 봉건국가였다. 농노들은 영주의 직영지에서 부역을 하며, 
남는 시간에 소작지를 경작했다. 그나마 수확의 절반 이상을 지주에게 바쳐야 했다. 이중삼중의 수탈을 견디다 못한 농노들은 몰래 도망쳐서 카자크에 합류하였다. 그런 와중에 카자크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간섭이 심해졌다. 그러자 카자크들은 발끈하였고, 마침내 1667년에 무력봉기를 일으킨다.

카자크 무리는 스텐카 라진의 지도 아래 대상인과 귀족에 대한 약탈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많은 식량과 옷, 보석 등을 빼앗아 
주변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후 2년간 스텐카 라진은 볼가 강 하류에서 카스피 해에 이르는 넒은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스텐카 라진은 농민들 사이에서 스타가 됐다. 무리는 점점 불어났다. 더 많은 식량과 물자가 필요하게 됐다. 고심하던 스텐카 라진은 페르시아로 눈을 돌린다.

1670년, 카스피 해의 검은 물결을 가로질러 페르시아로 진격한 라진의 군대는 막대한 전리품을 얻었다. 
게다가 아름다운 페르시아 공주를 인질로 잡아왔다. 그 소식에 힘을 얻은 러시아 농민들은 곳곳에서 스스로 봉기를 일으켰다. 더불어 라진의 군대는 수만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볼가 강 유역의 볼고그라드와 아스트라한에 이어 사라토프, 사마라 등의 도시를 차례로 굴복시켰다. 그들 앞에는 어떤 적도 없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때 한 가지 문제가 반란군의 발목을 붙들었다. 스텐카 라진이 페르시아 인질과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공주의 미모에 취한 스텐카 라진은 정신 못 차리고 사랑에 탐닉하게 된다. 당연히 봉기의 칼끝은 무뎌졌다. 마침내 반란군 내부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곤혹스런 처지에 빠진 라진은, 결국 비장한 마음으로 공주를 강물에 집어넣고 만다.

공주의 비명을 뒤로 한 채 스텐카 라진은 분위기를 수습하였다. 그리고 차르 황제와 ‘맞장’을 뜨기 위하여 모스크바로 향하였다. 
하지만 1670년 10월, 이들은 심비르스크 근처에서 정부군과 접전을 벌여 처참하게 패하고 만다. 더불어 스텐카 라진은 머리에 큰 부상을 입고 간신히 카자크 마을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옛 동료들의 배신으로 1671년 4월에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압송됐다. 그리고 1671년 6월 16일. ‘최대한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하라’는 황제의 특별한 주문에 따라 모스크바 광장에서 손과 발과 목이 차례로 잘려나갔다.

그의 죽음으로 러시아 농민들은 절망했다. 하지만 곧 스텐카 라진이 처형 직전에 탈출해 어딘가 숨어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한 가닥 희망을 피어 올린 농민들은 현실이 고통스러울 때면 스텐카 라진을 기다리며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부른 노래는 숱한 전설과 함께 러시아 농민의 입에서 입으로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왔다.

한편, 스텐카 라진이 공주를 물속에 던진 것을 두고, 오늘날의 ‘로맨스 중독자’들은 말들이 많다. ‘그건 사랑이 아니야’라고도 하고, 
공주를 익사시킨 영웅의 잔혹함을 탓하기도 한다. 그런데 당시 페르시아 공주가 ‘미인계’를 자초해 지도자의 눈을 흐리게 한 첩자였다는 설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스텐카 라진이 공주를 물속에 집어 던진 까닭에 누구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지 않을까. (2007.11.14 )

박남일 자유기고가 (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 저자)